중구 을지로의 외환은행 본점 1층 접견실. 9일 오후 1시30분쯤 프랭클린 발야(31·필리핀)씨가 남색 정장에 하늘색 와이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줄무늬가 들어가 있는 남색 넥타이에 외환은행 직원 신분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발야씨는 지난 9월 외환은행 필리핀 마닐라 지점에 취업해 외환 송금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0월에 한국으로 건너와 외환은행 본점에서 신입직원 연수를 받는 중이다.
하지만 5개월 전만 해도 그는 경기도 용인의 발전설비 부품 공장에서 기름때를 묻히고 일하던 외국인 근로자였다. "공장에서 일할 때는 한국 동료들에게 '이 새×야', '××놈아'하는 욕도 가끔 들었어요. 제품 검사하는 일을 했는데 불량품이 나오면 뒤통수도 한 대씩 맞기도 했어요. 하지만 은행원이 되니 직장 동료나 상사들이 저를 '미스터(Mr.) 발야'라고 부르더군요. 어색하긴 하지만, 하루아침에 신분이 상승한 것 같아서 기분은 좋아요."
그는 필리핀 세인트 퍼디낸드 대학(Saint Ferdinand College)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수출용 신발 제조업체에서 회계담당 직원으로 일했다. 당시 한국 돈으로 월 20만원 정도를 받았다. 그러다 결혼과 함께 딸이 태어나면서 집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2005년 7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필리핀에서 '화이트 칼라'였던 발야씨도 한국에서는 공장말고는 일할 곳이 없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 1년 동안 공장에서 부품 포장하는 일만 했어요. 손이나 옷에 기름이 마구 묻었지만 아무런 기술이 없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죠. 밤 10시, 12시까지 거의 매일 야근을 했고, 주말도 거의 못 쉬었어요. 필리핀에서 서류 작업만 하다 갑자기 공장에서 일하려니까 힘들어 죽겠더군요. 비참하다는 생각도 했죠."
몸은 힘들었지만, 보수는 괜찮았다. 한국 공장에서 야근과 휴일 근무를 빠지지 않으면 한 달에 140만~200만원을 벌 수 있었다. 그는 "내 신세가 처량하다는 생각도 가끔 들었지만,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떠올리며 참고 일했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한 번도 직장을 옮기지 않고 성실히 일한 덕에 3년 동안 3500만원을 고국으로 송금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 7월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끝나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필리핀에서 다시 일자리를 찾고 있던 중 한국산업인력공단 필리핀 지사에서 연락이 왔다. "외환은행 마닐라 지점에서 한국어가 가능하고, 회계 업무 경험이 있는 직원을 채용한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일했던 공장 사장의 추천서와 대학졸업장, 경력 증명서를 첨부해 원서를 내고 현지에서 면접시험을 거쳐 지난 9월 합격통보를 받았다. 한국 은행원이 됐다는 소식이 한국에서 함께 일하던 필리핀 동료들 사이에 퍼지자 축하 전화가 쇄도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올해 하반기부터 한국에서 일하다 돌아간 외국인 근로자가 고국의 한국 기업에서 다시 일할 수 있도록 취업을 알선하는 '외국인 근로자 귀국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교육을 받기 위해 외환은행 본점에 첫 출근하던 날, 그는 공장에서 일하던 때처럼 면바지에 티셔츠를 걸치고 나타났다. 은행 동료들로부터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동대문 시장에서 7만원을 주고 정장과 와이셔츠, 넥타이 한 세트를 구입했다.
비록 '동대문 표' 양복과 넥타이였지만, 정장의 힘은 대단했다. "일요일이 되면 필리핀 동포들이 많이 모이는 혜화동 성당에서 송금 업무 상담을 하는데, 다들 제게 깍듯하게 대해줘요. 제가 출세했다고 말끝마다 'sir(영어표현에서 상대방에 대한 존칭)'를 붙여 주고요."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송금 업무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는 외환은행 입장에선 발야씨가 최적의 인재다. 개인마케팅부 노광윤 차장은 "발야씨는 한국어도 가능하고,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데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실정도 제대로 알고 있어서 우리 은행에서 꼭 필요한 인재"라고 말했다.
그는 석 달간 일정으로 외환은행 본점에서 마케팅 업무와 송금 업무를 배우고 내년 1월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외환은행 마닐라 지점에서 근무하며 한 달 50만원을 받는다. 1년 중 3~4달씩 한국 파견을 나오면 체류비로 매달 140만원을 더 받는다.
발야씨는 "한국은 나에게 최고의 기회를 준 나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게 아쉬운 점도 있다고 했다.
"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 노동자들도 '에이씨' '××'하는 욕을 다 알아 들어요.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아무렇게나 욕하는 것은 나빠요. 은행에서 일하건 공장에서 일하건, 외국인 노동자를 똑같은 사람으로 대해 줬으면 좋겠어요."
